AI를 쓰면 일이 줄어들 줄 알았습니다. 막상 현장에서 벌어진 일은 정반대였습니다. 한 달은 잡아야 했던 랜딩페이지 작업을 이제는 하루에 여러 개의 시안으로 만들어 비교합니다. 일이 끝나서 여유가 생겼느냐고요? 오히려 그동안 손대지 못했던 일이 눈에 더 많이 들어옵니다.
처음에는 분명 생산성의 문제였습니다. 페이지 하나를 바꾸려면 기획을 정리하고, 디자인을 요청하고, 개발 일정을 맞춰야 했습니다. 수정 의견이 쌓이면 다음 달로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이제 AI로 문구와 레이아웃을 빠르게 만들고, 코드를 수정하고, 화면을 확인하는 사이클을 훨씬 짧게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착각하기 쉽습니다. 페이지를 빨리 만들었다고 마케팅 성과가 빨리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제작 속도와 구매자의 의사결정 속도는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산출물이 늘어나는 것과 성과가 늘어나는 것은 다릅니다
예전에는 랜딩페이지 하나를 완성하는 일 자체가 큰 프로젝트였습니다. 지금은 두 가지 헤드라인, 세 가지 CTA, 산업별 메시지를 각각 제작하는 일이 기술적으로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그만큼 마케터는 새로운 질문을 해야 합니다. '오늘 페이지를 몇 개 만들었나'가 아니라 '각 페이지는 누구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도록 설계됐나'입니다.
B2B 고객은 관심이 생겼다고 바로 구매하지 않습니다. 내부 검토, 보안성 평가, 예산 협의, 실무 부서와 의사결정자의 의견 조율을 거칩니다. 첫 화면에서 제품 기능을 길게 나열하는 것보다 지금 왜 검토해야 하는지, 기존 방식의 불편이 무엇인지, 도입 판단에 어떤 자료가 필요한지를 명확히 설명해야 합니다.
AI가 빨라질수록 마케터의 판단은 더 비싸집니다
AI에게 '전문적인 B2B 랜딩페이지를 만들어 줘'라고 요청하면 그럴듯한 결과는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고객에게 맞는지는 AI가 저절로 결정해 주지 않습니다.
가령 개인정보 접속기록 관리 솔루션을 설명한다면 '통합 대시보드 제공'이라는 기능 설명에 그쳐서는 부족할 수 있습니다. 실무 담당자는 시스템마다 흩어진 기록을 어떻게 모을지 궁금할 것이고, 관리자는 감사 대응에 걸리는 시간을, 의사결정자는 도입 후 운영 부담과 위험을 물을 것입니다.
같은 제품도 **누가 읽고, 무엇을 판단해야 하느냐**에 따라 페이지 구성이 달라져야 합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프롬프트 기술만이 아니라 시장 이해, 고객 인터뷰, 영업과의 협업 경험입니다.
저는 이제 페이지를 만들기 전에 네 가지를 먼저 확인합니다
첫째, 타깃을 '기업 고객'이라는 뭉뚱그린 표현으로 두지 않습니다. 산업, 조직 역할, 도입 상황을 구체적으로 정합니다.
둘째, 기능보다 고객이 겪는 운영상의 문제를 먼저 씁니다. 고객이 자기 일처럼 느끼지 못하면 아무리 세련된 디자인도 오래 붙잡지 못합니다.
셋째, CTA를 '문의하기' 하나로 끝내지 않습니다. 바로 상담하기 부담스러운 고객이라면 사례 보기, 체크리스트 받기, 데모 요청처럼 다음 행동의 난도를 나눕니다.
넷째, 배포 후 무엇을 볼지 미리 정합니다. 방문 수나 CTA 클릭뿐 아니라 유효 문의와 영업 후속 대화까지 살펴야 페이지의 품질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아직 측정되지 않은 결과를 성공으로 포장하지도 않습니다.
결국 중요한 건 무엇을 더 만들지보다 무엇을 멈출지입니다
AI로 제작 비용과 시간이 내려가면, 그동안 미뤄 둔 작업을 무한히 시작하기 쉽습니다. 홈페이지 개편, 뉴스레터, 세미나 페이지, 고객 사례집, 산업별 제안 콘텐츠까지 손이 닿기 시작하니까요.
그래서 이제는 시작 기준만큼 중단 기준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읽는지 불분명한 콘텐츠, 후속 전환을 측정할 수 없는 캠페인, 영업과 연결되지 않는 리드는 많이 만드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AI는 마케터를 대신해 전략을 세워 주는 마법 같은 도구가 아닙니다. 다만 마케터가 머릿속에서 검토만 하던 가설을 실제 화면으로 옮겨 보고, 더 빠르게 틀리고, 더 빨리 고칠 수 있게 해 줍니다.
결국 AI가 바꾼 것은 제 작업 시간만이 아니라 **시도할 수 있는 일의 범위**였습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그 범위 안에서 무엇이 고객과 매출에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드는지 골라내는 일입니다.